대한민국 친중 세력 제거 작전 Part 3. 근현대사 이슈화(feat. 대한민국 정체성과 이데올로기 전쟁)
BGM : Metallica - Entersand Man(Stranger in Moscow, Moscow Russia 1991)
https://www.youtube.com/watch?v=TrkJ0adLofE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 사건과 정뤼청의 전라도 광주 공원 사건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당황스러울 것이다. 지금 정치계는 역사를 이용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친중 및 반국가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역사를 이용하고 있고 친중 및 반국가세력은 살아남기 위하여 역사를 이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결국 역사는 정치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전 포스팅 3부작을 통하여 정치가 역사를 어떻게 이용하고 어떻게 완성시키는지 설명하였다. 중국의 동북공정,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왜곡, 일본의 역사 왜곡 이 모든 것이 정치적으로 역사를 이용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번 포스팅을 통하여 각 정치 세력이 역사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알아볼 것이다.
PS 1. 우리나라 언론은 정말 문제이다. 정율성은 이미 중공으로 망명한 중공인이다. 그를 왜 한국식 이름으로 부르는가? 대한민국 언론은 어서 그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변경해야 할 것이다. 바로 정뤼청(Zheng Lücheng 혹은 Zhèng Lǜchéng)으로 말이다. 이 글에서는 그를 정뤼청으로 다룰 것이다.
PS 2. 친중에 좌우 없으며 친미에 좌우 없다. 이 역사 논쟁을 보수정당과 진보정당 과의 싸움이라고 보면 안 된다. 정확히 친중 세력 vs 친미 세력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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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체성 대결 Part 1. 개국절 논란
이 역사적 대결은 바로 정치권의 개국절 논란에서 시작되었다. 2017년 8월 15일, 문재인 전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2년 후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라고 선언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건국은 1948년이 아닌 1919년에 이뤄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 참고 사이트 : KBS 뉴스, 정치권 개국절 논란 1919 VS 1948…왜?,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534698 ]
이러한 역사관의 차이는 왜 존재할까?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국가의 정체성을 어떻게 확립하느냐의 이데올로기 싸움이기 때문이다. 1919년 김구 선생님의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의 정체성으로 삼는 쪽은 바로 친명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 힘 친중 정치 세력이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국부 이승만 대통령의 남한단독정부를 대한민국의 정체성으로 삼는 쪽은 바로 국민의 힘 친미, 친일 및 더불어민주당 친문 정치 세력이다.
필자는 이전 포스팅을 통하여 이 논란의 정답을 이미 밝힌 바 있다. 국가의 3요소인 영토, 주권, 국민을 모두 갖추었던 국부 이승만 대통령이 개국한 남한단독정부가 바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것이다. 상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아래의 포스팅을 참고하기 바란다.
https://gbcbaby.tistory.com/74
대한민국 정체성 대결 Part 2. 홍범도 장군 육군사관학교 흉상 철거 논란
홍범도 장군의 육군사관학교 흉상 철거가 요즘 세간의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역시 대한민국 정체성 대결의 연장선 상에 존재하는 사건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 운동가들은 미국과 서방세력을 위시하는 민주주의 정치 체계,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사상으로 무장한 독립 세력이 존재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국부 이승만 대통령,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있다. 이들은 미국을 거점으로 하여 군자금 모금과 외교 활동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이 세력은 매우 작았다.
대부분의 독립 운동가들은 사회주의 정치 체제, 공산주의 경제 체제의 사상으로 무장하였으며 소련, 중공의 군자금과 지원을 받아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던 독립군 세력이다. 이들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군자금을 준다는 소련의 이야기를 듣고 1921년 자유시에 모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참변이 발생하면서 조선을 위하여 싸우던 '독립군 세력'의 지휘관은 제거당하거나 소련과 중국에게 흡수되어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충성을 맹세한 공산주의자가 되어야 했다.
물론 자유시 참변을 당하지 않은 독립군은 존재하였다. 그러나 자유시 참변은 그 당시 독립군의 세력이 완전히 와해되기에 충분하였으며 독립군 내에서도 사상적 갈등에 의하여 내부 분열이 발생하게 된다. 김좌진 장군 암살 사건 역시 공산주의 독립운동 세력이었던 고려공산당의 소행임이 하얼빈영사관 경찰서장의 보고서에 밝혀졌다.
[ 참고 사이트 : 위키피디아, 자유시 참변, https://ko.wikipedia.org/wiki/%EC%9E%90%EC%9C%A0%EC%8B%9C_%EC%B0%B8%EB%B3%80 ]
[ 참고 사이트 : 월간조선 뉴스룸,日本 외무성 외교사료관 문서 입수 / 최종확인 김좌진 암살범은 고려공산청년회 金信俊「하얼빈 일본총영사관의 배후조종說」은 확인 안 돼, 2007.10,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710100020 ]
문제는 홍범도 장군의 행적이다. 홍범도 장군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 파 대한독립군의 사령관이었다. 과연 이를 대한민국의 강병을 양성하는 육군사관학교에 흉상을 세울 정도의 인물이라는 것인가? 직접 판단해 보기 바란다.
- 자유시 참변 당시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던 대한독립군은 자유시참변 당시 독립군 학살에 가담하였다. 물론 홍범도 장군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지휘 체계가 확립되어 있던 군부대가 사령관의 명령 없이 자발적으로 군사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가?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한독립군은 지휘관의 명령을 어긴 셈이 된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은 자신의 부하를 군법으로 처벌하였다는 정보가 없다.
- 자유시 참변 이후 군사재판에서 재판장을 맡았다. 독립군 포로를 공산당에 가입하라고 회유와 협박을 하였다.
- 자유시 참변 이후 볼셰비키 혁명군에 가입하였으며 레닌에게 포상으로 금화 100 루블과 아래의 사진의 의복, 권총을 포상받았다. 홍범도 장군은 레닌이 준 의복과 권총을 매일매일 입고 다녔으며 자랑하면서 다녔다고 알려져 있다.
- 당시 고려인은 소련에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시민권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범도 장군은 소련 시민권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소련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았다.
즉, 자유시 참변과 김좌진 장군 암살 사건 이후 만주, 연해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해 온 독립군은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나누어져 서로를 죽고 죽이는 암투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우리는 당시 독립군의 내전은 결국 공산주의 진영의 승리로 끝이 났으며 공산주의 진영은 독립보다는 한반도의 공산화를 위하여 노력하던 집단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홍범도 장군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 설치하고 그를 기리는 행위는 바로 대한민국 국군이 공산주의 세력을 배우고 그들의 정신을 기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정치 체계와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받아들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뿌리째 흔드는 것이다. 그래서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에 격렬히 반대하는 언론, 시민 사회, 정치 세력이 누구인지 보면 답이 나오는 것이며 홍범도 장군을 성역화를 저지르는 세력이 바로 친중 및 친명계 정치 세력이다.
[ 참고 사이트 : 동아일보, [송평인 칼럼]볼셰비키 홍범도에게 바친 최고 예우, 2021.08.25,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10824/108741073/1 ]
물론 필자는 독립운동을 전개한 선조의 투쟁과 노력을 폄하하고자 이 글을 작성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사실과 근거로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홍범도 장군의 공은 비록 존재하지만 과 역시 존재하는 인물인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사회주의는 대세였다. 따라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가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역사적 사실일 뿐인 것이다.
실제로 보수 우파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박정희 대통령도 남로당에서 활동하던 이력이 존재한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은 이데올로기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과 다르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이 된 후 철저히 반공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북한의 김일성은 박정희 대통령을 변절자로 여겼으며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하여 김신조 등 무장공비 31명을 남파하였다. 그렇다. 이 사건이 바로 1.21 사태 혹은 청와대 습격사건이다.
이는 이중 잣대가 아니다. 홍범도 장군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분은 맞지만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소련에 충성한 사람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출신이면서 남로당 출신이었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 철저히 반공 정책을 펼쳤으며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은 공적이 존재하는 인물이다. 즉, 박정희 대통령을 홍범도 장군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킨 인물은 바로 홍범도 장군이 아닌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 참고 사이트 : 중앙일보, "박정희 목 따러 왔다"는 김신조, 진관사 앞에서 멘붕, 2020.11.14,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920181#home ]
[ 참고 사이트 : 미디어오늘, 대통령실 “남로당 박정희 경제발전 기여, 홍범도와 달라” 이중잣대 논란, 2023.08.31,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2197 ]
https://gbcbaby.tistory.com/55
대한민국 정체성 대결 Part 3. 전라도 광주 정뤼청 공원 조성과 정뤼청 찬양 여론 조성
필자는 정말 정뤼청 논란은 뜬금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는 중공에 망명하여 중공의 인민이 되었다. 그는 1939년 가을, 그와 공목아 합작으로 <팔로군대합창> 가사 작곡 창작을 완성하였으며, 그중에서 <팔로군진행곡>과 <팔로군 군가>는 널리 유행되어 불러지는 인민군대군가로 되었다. 해방전쟁시기, <팔로군진행곡>은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으로 이름을 고치고 가사를 간략하게 고쳤다. 그리고 1988년 7월 25일 중국공산당중앙군사위원회에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정식으로 확정되었다. 게다가 그는 조선인민투쟁과 중조우의를 찬미하는 <조선인민군진행곡>, <중조우의>등 많은 작품들을 작곡하였다.
[ 참고 사이트 : 중화인민공화국 광주총영사관, 중국의 유명한 작곡가 - 정율성, 2009.11.17, http://gwangju.china-consulate.gov.cn/kor/zt/zlck/200911/t20091117_5790802.htm ]
과연 이런 자를 기리는 공원과 각종 시설이 지어져야 하는가? 그러나 이를 추진하는 정치 세력은 정뤼청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러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 그는 과가 큰 인물이다. 그것도 정말 큰 과가 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적군이었던 북한군과 중공군의 전투력과 사기를 증진시키기 위한 온갖 행진곡과 군가를 작곡하였다.
정뤼청을 대한민국의 영웅으로 만들려는 세력이 바로 친중 친북 세력이며 이들의 중심은 바로 친명계 더불어민주당이 존재하는 것이다. 필자는 정뤼청을 반국가적 인물이라고 명시한 재향군인회의 주장이 백 번 천 번 옳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을 적화 통일하기 위하여 노력한 인물을 왜 대한민국에서 영웅으로 만들어 그를 기리는 공원과 각종 시설이 지어져야 하는가? 이는 절대로 김대중 대통령의 정신이 아니다!
[ 참고 사이트 : News1 뉴스, 향군 "정율성은 '反국가적' 인물… 단 1원도 써선 안 돼", 2023.08.24, https://www.news1.kr/articles/?5150079 ]
결론과 글을 마치며
필자는 단언한다. "북한을 좋아하고 북한의 공산주의가 좋은 사람들은 어서 짐을 싸고 월북하여 북한의 인민이 되라. 그리고 김정은 백두혈통에게 충성하라." 그리고 "중공을 좋아하고 중공의 공산주의가 좋은 사람들은 어서 짐을 싸고 중공으로 넘어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이 되라. 그리고 중국 공산단에 충성을 맹세하라." 왜 대한민국에 와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흔들고 대한민국의 국민을 호도하고 현혹하고 있는가? 왜 대한민국에 와서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대한민국에서 벌어들인 자금을 왜 중공과 북한을 돕는 데 이바지하는가?
필자가 BGM에 메탈리카 형님들의 Entersand Man 1991년 모스크바 라이브 투어를 선정한 이유는 바로 1991년이 소련이 붕괴된 해이기 때문이다. 이 당시 모스크바에 이 공연을 보기 위하여 몰린 인파가 80만 명 ~ 140만 명으로 추정되며 영상 도중에 헬리콥터가 떠다니면서 안전 관리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이 공연이 바로 소련 해체의 전주곡이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물론 해당 공연은 소련 해체를 선언한 1991년 12월 25일 ~ 26일보다 약 4개월 전의 일이다. 바로 1991년 당시 소련의 공산진영이 붕괴된 것처럼 필자는 중공과 북한의 공산진영 역시 무너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중공과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이 모두 없어지기를 바란다.
[ 참고 사이트 : BBC News 코리아, 소련: 해체 30주년...'소련 붕괴' 부른 5가지 원인, 2021.12.26, https://www.bbc.com/korean/international-59792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