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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개복치의 주목 : 국제편

대한민국 핵무기 개발의 역사 : 박정희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부제 : 필자가 대한민국 핵무기 개발을 반대하는 이유)

★개스피★ 2023. 3. 25.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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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Two Steps From Hell - Birth of Hero(Classics)
https://www.youtube.com/watch?v=zu93FnHm90g 

필자는 감히 고 박정희 대통령께 이 노래를 헌사하고자 한다.

필자는 대한민국의 핵개발 역사를 돌이켜보고자 한다. 국제 정세라는 것은 냉혹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하여야 한다.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1970년대에 우리는 이념의 잣대로 보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동맹국 간의 갈등 구도를 확인할 수 있다. 닉슨 독트린과 미국의 주한미군의 철수 통보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주국방을 실현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스스로 갖도록 만들었다. 그의 선택은 핵개발이었다. 필자는 박정희 대통령의 핵개발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만주국의 인연,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과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

박정희 대통령과 기시 노부스케의 인연은 만주국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일제가 미국에 패망하고 대한민국이 독립한 이후에도 이 두 세력의 커넥션은 이어져왔다. 기시 노부스케는 1936년 만주국 정부의 산업부 차관이 되어 1940년 일본으로 귀국할 때까지 만주국의 경제를 담당하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여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성적 석차 2등으로 만주국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성적우수자 추천을 받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57기로 입학한 후 1944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본 제국이 수립한 만주국의 일제관동군장교로 근무하였다. 
 
비록 기시 노부스케는 1960년 일본 총리에서 사임하였지만 그의 친동생인 사토 에이사쿠는 일본의 제61대 ~ 63대 총리를 역임하였다. 사토 에이사쿠는 기시 노부스케의 소개로 대한민국 박정희 정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과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는 1965년 12월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동시에 일본 사토 에이사쿠 총리는 대한민국에게 독립축하금을 전달하였다. 또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천하였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는 대한민국 광부 5천 명 간호사 2천 명을 서독에 파견하는 대가로 1억 5천만 마르크(당시 3,000만 달러) 박정희 정권에게 무담보 차관을 제공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이 자금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산업화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중공업에 투자하게 된다. 제철 산업은 포항에 건설한다. 이는 현재 포스코(구 포항제철)의 전신이다. 또한, 경부고속도로 건설 및 새마을 운동 등 경제 발전 5개년 계획의 시작이었다.
 
현재 대한민국 외교부가 일본 강제 징용의 피해자 분께 대한민국이 보상한다는 논리는 여기서 나온다. 즉, 일본은 이미 대한민국에게 보상하였는데 이 보상금을 대한민국 정부가 사용했으니 이를 대한민국 정부가 보상한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참고문헌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일본(1961~1972), https://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2804&sitePage= >

 

기록정보서비스>국정분야주제별검색>분야별주제검색

박정희 시대 대일관계를 다각적으로 조명할 필요성이 있다. 박정희 시대는 한일외교관계가 정상화된 시기로서 한국은 일본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20년만인 1965년 12월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

www.archives.go.kr

<참고문헌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식지 역사공감, https://www.much.go.kr/webzine/vol37/sub/sub1.html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식지 역사공감

역사를 기록하고 증언하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식지 역사공감

www.much.go.kr

닉슨 독트린과 주한미군의 철수, 대한민국은 공산화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닉슨 독트린의 이유는 아래의 필자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미국의 부채 상승, 베트남 전쟁에서 서독과 일본의 반사이익 문제였다. 또한 미국의 부채 상승은 미국의 금본위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이를 눈치챈 유럽 서양 열강들은 미국에 달러를 주고 금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었다. 그리고 닉슨 대통령은 아시다시피 금본위제를 폐지하기에 이른다.
 
https://gbcbaby.tistory.com/16

 

금본위제 논란! 금본위제의 의미

BGM : 진삼국무쌍 7 OST - Crush'em All https://www.youtube.com/watch?v=2dZKk-_j3EM 금본위제가 시행된다면 금이 없는 사람은 자산이 모두 없어질 것이다. 금본위제의 부활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하여 시장이 혼란

gbcbaby.tistory.com



닉슨 대통령은 닉슨 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철수를 강행한다. 이는 미국이 더 이상 자유진영의 경찰 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다. 당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1970년 박정희 대통령에게 주한미군 2만 명을 이듬해 철수하고 1975년까지 완전히 철수하겠다고 통보하였다. 
 
또한, 일본 역시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의 닉슨 독트린의 영향을 굉장히 우려하였다. 사토 에이사쿠는 대한민국이 공산화가 되면 그다음은 일본 차례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또한, 미국은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 진영을 지켜주는 경찰의 역할을 하지 않을 경우 우리도 공산화될 수 있다는 위협을 느낀 것이다. 이는 일본뿐 아니라 서독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위기감을 느낀 것은 다름 아닌 대한민국의 박정희 정권이었다.
 
따라서, 서독과 일본에게 투자받은 대한민국은 핵개발을 위한 인프라 구축과 기술 확보에 나선다. 처음 대한민국이 접촉한 국가는 바로 프랑스이다. 1975년 프랑스의 국영원자력기업 SGN(Saint Gobin Techniques Nouvelles)과의 재처리 기술 공급 계약이 체결되면서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은 성공을 눈앞에 뒀다. 이 계약이 실행되었다면 연간 20kg의 플루토늄 추출이 가능했다고 한다. 동시에 박정희의 특명으로 외국에 나가있는 우수한 한국인 과학자들이 귀국하였고, 오원철 수석은 캐나다를 방문해 플루토늄 추출이 용이한 캔두(CANDU) 원자로의 도입을 진행했다. 또한 한국은 이 시기 나이키-허큘리스 미사일의 도입과 국산화를 진행하였다. 즉, 프랑스에서 재처리 시설, 캐나다에서 중수로, 미국에서 발사체 기술을 확보해 핵개발과 핵 체계를 단번에 구축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출처 : 나무위키, 대한민국 핵무장 https://namu.wiki/w/%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20%ED%95%B5%EB%AC%B4%EC%9E%A5#s-2.1 >
 
또한, 일본의 사토 에이사쿠는 이미 3대 비핵화를 선언하였다. ‘핵무기는 만들지도, 보유하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이른바 ‘비핵 3원칙’을 1967년 국회 답변과 1968년 시정연설을 통해 표방한 상황이었다. 사토 총리는 그 공로로 1974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대한민국 박정희 정부에게 핵개발을 같이 하자고 뒷거래를 제안하였다. 바로 핵무기 개발을 대한민국에서 하도록 말이다. 대한민국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게 되면 그 기술을 일본과 서독에게 공유한다는 조건이었다. 
<출처 : “대통령은 과거 연연말고 미래 보고 가야한다”,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5 >

 

“대통령은 과거 연연말고 미래 보고 가야한다” - 아틀라스뉴스

인터넷에서 우연하게 박정희 대통령의 통역관으로 일했던 백영훈씨의 회고담을 유튜브로 보게 되었다. 그는 1964년 12월 박 대통령이 서독에 국빈방문하는 자리에서 대통령을 수행했고, 루드비

www.atlasnews.co.kr

<출처 : 한겨레, ‘핵 무장’ 겉 다르고 속 다른 일본,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451455.html >

 

‘핵 무장’ 겉 다르고 속 다른 일본

공개적으로 ‘비핵3원칙’ 밝힐때 뒤로는 서독에 핵무기 개발 제안

www.hani.co.kr

미국의 입장에서 보자.. 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의 추축국 세력의 부활이잖아?

미국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은 만주국에서 군인으로 근무했던 이력이 있다. 일본 사토 에이사쿠의 정치적 유산은 야마구치 현(구 조슈번, 즉 메이지 유신을 이끌어 낸 정치세력이며 일본 제국을 건설하였다)이며 서독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총리(다만, 에르하르트 총리는 나치에 저항하였던 인물이다.)의 연합을 말이다. 2차 세계대전 시절 추축국의 연합으로 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따라서 미국은 이를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과 태평양 전쟁을 치렀던 경험이 있다. 이 연합을 반길 리가 없었다. 미국이 박정희 대통령의 핵개발을 막기 위하여 진행한 전략은 아래와 같다.
 
 1) 미국은 프랑스를 압박하여 플루토늄 재처리 기술 공급 계약을 무산토록 하였다. 
 2) 박정희 대통령에게 주한미군 철수하지 않겠다고 회유하였다. 또한, 한미연합사를 발족하였다. 이는 대한민국 유사시에 미국이 자동으로 개입하는 것을 포함하였다.
 3) NPT(핵 확산 방지조약) 비준 강요, 핵무기 개발 포기 선언 유도
 4) 원전 고리 2호기 건설에 대한 금융지원 보류
 
<참고문헌 : 통일뉴스, 키신저, 박정희의 ‘핵무기 제조 비밀 계획’ 무산시켜,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482 >

 

키신저, 박정희의 ‘핵무기 제조 비밀 계획’ 무산시켜 - 통일뉴스

미 중앙정보국(CIA)이 1975년 초 한국 정부의 핵무기 제조 비밀 계획에 대한 첩보를 입수해 본국에 타전하면서 미 포드 행정부1)의 한국 정부에 대한 핵무기 개발 계획 포기 압박이 시작되었다.미

www.tongilnews.com

그리고 부마항쟁이 있던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이후 전두환 정권은 핵무기 개발을 공식적으로 포기한다. 아웅산 테러 사건 전까지도 전두환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핵개발 유지를 이어받아 몰래 개발을 시도하였으나 아웅산 테러 사건(1983년 10월 9일) 이후 완전히 핵개발을 포기하게 된다. 이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미얀마 방문을 보좌하던 대한민국의 행정부 수장이 대부분 사망하였으며 전두환 대통령 본인 역시 생명의 위협을 받았을 것이다. 아웅산 테러 사건 발생 한 달 뒤인 1983년 11월 11일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내외가 대한민국에 방문하였으며 이때 전두환 대통령은 레이건 대통령에게 핵무기 개발 중지를 약속하게 된다.
 
<참고문헌 : 위키리스크 한국, 청와대-백악관 X파일(16) '핵무기 개발 막기 위해 시해시켰다?' 확산되는 미국의 박정희 암살 사주설, http://www.wikileaks-kr.org/news/articleView.html?idxno=15786 >

 

청와대-백악관 X파일(16) '핵무기 개발 막기 위해 시해시켰다?' 확산되는 미국의 박정희 암살 사주

[특별취재팀]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내용이 전 세계에 알려진 이후 각국에서 ‘미국의 암살 사주설’이 폭넓게 번지기 시작했다.미국이 CIA한국지부를

www.wikileaks-kr.org

<참고문헌 : 동아일보, 전두환, 정권 승인 대가로 美에 핵포기, 전투기 구매 약속,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03661/1 >

 

전두환, 정권 승인 대가로 美에 핵포기, 전투기 구매 약속

1981년 1월20일, 민주당의 카터 대통령을 밀어내고 백악관의 새 주인이 된 공화당 정권의 레이건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한국에 다섯 줄짜리 편지 한 통을 발송한다. 5개월 전인…

shindonga.donga.com

<참고문헌 : 위키피디아, 아웅산 묘역 테러 사건,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9B%85%EC%82%B0_%EB%AC%98%EC%97%AD_%ED%85%8C%EB%9F%AC_%EC%82%AC%EA%B1%B4 >

 

아웅산 묘역 테러 사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웅산 묘역 테러 사건은 1983년 10월 9일에 미얀마의 옛 수도 양곤에 위치한 아웅산 묘역에서 북한이 미리 설치한 폭탄이 터져 21명이 사망하고 수십여 명이 부

ko.wikipedia.org

<참고문헌 : MBC뉴스, 한국은 전두환 정권 당시 핵개발계획 자세하게 소개/일본 언론[차경호], https://imnews.imbc.com/replay/2004/nwdesk/article/1944811_30775.html >

 

한국은 전두환 정권 당시 핵개발계획 자세하게 소개/일본 언론[차경호]

 

imnews.imbc.com

<참고문헌 : e영상역사관, 대한뉴스, https://www.ehistory.go.kr/page/view/movie.jsp?srcgbn=KV&mediaid=10992&mediadtl=24101&gbn=DH >

 

e영상역사관 » 영상보기

로날드 레이건 미 합중국 대통령 각하 내외분 공식방한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 내외 김포공항 도착(11월 11일) -공항에서 영접하는 전두환 대통령 내외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 의의 -한반도 긴장이

www.ehistory.go.kr

미국은 대한민국의 단독 핵무장을 반대한다. 현재도 유효하다.

현재 윤석열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핵무장을 주장하고 있다. 미국 내 일각에서도 대한민국의 단독 핵무장에 대하여 긍정적인 여론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의 공식입장은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동일하다. 대한민국의 단독 핵무장을 반대한다. 차라리 미국의 전술핵을 대한민국에 배치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여 미국과 협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첫 째, 대한민국이 단독으로 핵무기를 개발하고 무장하게 되면 대한민국은 한미 동맹은 파기됨과 동시에 미국의 제재를 받게된다. 대한민국은 수출로 먹고 사는 국가이다. 게다가 식량은 자급자족이 불가능하고 산업에 필요한 원소재 및 에너지를 수입할 수 없다. 이러한 나라가 과연 미국의 제재를 견딜 수 있겠는가? 한 번에 빈민국으로 전락할 것이다.
 
둘 째,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은 국익을 위하여 핵무기 개발과 핵무장을 준비한 것이다. 두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미국의 닉슨 독트린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군사적 공백을 핵무기로 채우려고 했던 것이다.  필자는 정치 성향을 떠나서 공은 높여주고 과는 덮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국민이 대통령을 대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정치는 그런 것이다. 국익을 위하여 적국과 협상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국익을 위하여 동맹국과 대립할 수도 있으며 국익을 위하여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것이 정치이다. 그러나 두 대통령의 말로와 사후 평가는 어떠한가? 그리고 두 대통령을 향하는 비난은 어떠한가? 국민이 분열하여 대한민국의 모든 전직 현직 대통령을 공격하는 행위는 이제 중지되어야 한다... 
 
PS. 다음 글은 가능하다면..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와 아소 다로 전 일본 총리에 대한 글을 작성할 계획이다. 일본 자민당의 뿌리와 계파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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